Not Ashamed of the Gospel/ko
From Gospel Translations
로마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과 하나님을 찬미하는 말을 들고 거리로 나가 겠습니다. 우리는 걷고 노래하고 기도하며 그리고 듣을 모든 이들에게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사랑을 소리 높여 말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문제가 제기 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주님께서 우리 로마서 설교 시리즈의 시간을 조절하셔서 오늘의 말씀은 로마서 1:16이 된거 같습니다. 특히나 시작하는 말씀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구절과 그 다음 구절은 로마서의 바로 핵심- 책에서의 일종의 제목 문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16절의 말씀을 공부하는데 적어도 삼주의 시간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무엇이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다음의 말에 중점을 두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여러분은 이 말씀과15절과의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로마에서 복음 증거하기를 열망하는 이유(15절)는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16절). 좀 더 일반적인 질문으로 시작해 보죠. 무엇이 사람들을 부끄럽게 느끼도록 할까요? 몇가지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1) 한 소년이 그의 친구들에게 동내에 새로 이산 온 여윈 아이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고 허풍을 떱니다. 그래서 둘은 달리기 시합-예를 들어, 동네 한바퀴 돌기-을 하기로 하죠. 둘은 동네를 걸으면서 어디에 장애물이 있는지 어디서 모퉁이를 돌아야 하는지 봅니다. 그리고는 시작선에 섭니다. 동내 아이들이 다 나와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준비, 차렷, 출발”이 외쳐집니다. 허풍을 떨던 소년이 단지 (여윈 아이가 달려 지나가면서 만든) 먼지 속에 남습니다. 새로 이사온 여윈 아이가 허풍선이를 35-45미터 이상 앞질러 달리기 시합을 끝냅니다. 이 경우 허풍을 떤 아이는 부끄러움을 느끼겠죠. 자기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 느낄 것입니다.
2) 또는 당신이 학교에서 싫어하는 아이의 아버지가 감옥에 있다고 가정합시다. 당신이 이 일로 그 아이를 놀리고 누구 누구의 아버지는 도둑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닌다고 가정합시다.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는 큰 은행의 성공적인 재무 책임자라고 자랑했다고 합시다. 그러던 어느날 당신의 아버지가 수억대를 횡령한 혐의로 체포되어 구속됬다는 끔찍한 소식을 전하게 됩니다. 다음날 당신은-자신과 당신의 아버지 둘 다에 대해-너무 부끄러워서 학교에 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3) 또는 당신이 외모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라고 가정합시다- 머리 모양도 꼭 완벽하게 되야하고 옷에도 아주 이상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티에 초대를 받아서 당신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떻게 보여야 할지를 상담 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도착해서 당신의 복장이 완전히 부적절 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도 않을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당신이 연극에서 배역을 맡았다고 합시다-긴장을 많이 하고 연기를 그리 잘 하는 편이 아니라 그냥 작은 배역이었죠. 연극의 아주 중요한 부분에 두줄 정도의 대사가 있었다고 합시다. 연극이 시작됩니다. 당신의 가슴이 터질것 같이 쿵덕 거립니다. 관중이 많습니다.다른 사람들이 멋지게 연기를 해내고 있어서 더욱 기대감이 높아집니다. 당신의 순간이 가까워 집니다. 바로 그 순간에, 당신은 굳어 버리고 맙니다. 그 두줄의 대사를 말하려고 노력해 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있지만 당신은 그걸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의 대사를 속삭여 줍니다. 소용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다보니 당신의 대사없이 연극이 계속 진행됩니다. 당신은 무대를 뛰어 내려갑니다. 그리고 이 지구상에서 달아나고 싶습니다. 너무도 부끄럽습니다.
우리 모두는 당황스러운게-또는 부끄러운 것이-무엇인지 앏니다.
무엇이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당신을 당황하거나 부끄럽지 않도록 해줄 까요? 글쎄요, 달리기에서 져서 새로 이사온 야윈 아이에게 망신을 당하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는 튼튼한 다리가 한가지 답이 되겠지요. 그리고 좀 더 정직한 아버지가 되서 횡령을 하지 않았다면 그를 부끄러워 하지 않았겠죠. 친구들이 좀 더 나은 조언을 해서 파티에 그렇게 부적절하게 옷을 입고 나타나지 않았을 수도 있겠죠. 두툼한 배짱이 당신의 대사를 기억하고 훌륭하게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도왔을 수도 있죠. 다시 말해서, 당신 자신과 당신 가족, 그리고 당신 친구들이 항상 당신을 최고로 유리하게 보이게 한다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않고 또 절대로 아무도 당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는 거죠.
복음은 부끄러움을 일으키고 또한 그것으로 부터의 자유를 줍니다.
자, 바울이 로마서 1:16장에서 그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음”을 말할때, 이것이 그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해준 것입니까? 그가 자신을 항상 최고의 유리한 입장에 놓아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정확히 그 반대지요. 복음을 믿으며 전하는 일은 끊임없이 바울을 불리한 입장에 처합니다. 이것은 끊임 없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바울을 모욕하게 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복음 사역에서 부끄럽게 했던 것들을 나열해 줍니다(고린도 후거 11:23-26에서):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다시 말해서, 바울의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 있었던 방법은 자신을 가장 유리하게 보이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또는 충분한 재치가 있어서 사람들이 항상 그를 좋아하고 그가 하는 일들을 인정해 주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 전 구절 로마서 1:14를 보세요.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바울이 그 당시 불신이 찬 광대한 세상을 내다 보고 자신이 모두에게 빚을 진것 같이 느꼈습니다. 그 당시의 이교도를 철처히 경멸하는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 점을 명심 하십시요. 우리의 보수적인 생활 양식이 미국에서 너무 정치적으로 다루어져서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이게 빚을 졌다고 느끼기 보다는 경멸을 느끼기가 너무 쉽습니다. 바울은 죄는 싫어 했어도 그렇지는 않았지요. 오히려, 그는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은혜 받음에 압도되어, 모든 사람들-헬라인, 야만인, 지혜있는 자, 어리석은 자-에게 빚진자로 자신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울에게 그의 빚을 갚길 원했습니까? 여러분 주의에 믿지않는 이웃과 동료들이 당신이 주고자 하는 것을 원합니까? 대분분은 그렇지 않죠. 고리도 전서 1:22-23에서 그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 헬라인,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빚을 갚고 싶었지만, 대부분은–오늘과 마찬가지로- 그의 사랑, 은혜, 그리고 소망의 메세지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미련한 것이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16장에서 복음이 부끄러움으로 부터의 바울의 자유를 준 토대가 된 것임을 보기 전에 우리는 먼저 그것(복음)이 바울에게 부끄러움을 준 토대가 됬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복음은 두가지 일을 합니다: 그것을 믿지 않으려는 자들에게는 부끄러운 행동을 하게 하고 그것을 빋는 자들에게는 부끄러움으로 부터의 자유를 줍니다.
바울은 이 두가지를 다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흡사했습니다. 예수님도 그의 친구들에게 신성 모욕했다는 거짓 비난을 받고, 장대로 맞고, 비웃음과 조롱을 당하고, 옷을 벗기고 채찍질을 당하고, 공공적으로 고문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남은 구할 수 있으되 자신은 구할수 없도다”라고 사람들의 외쳐될때에 바보처럼 보여졌습니다.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했을때, 예수님과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이 이 모든 부끄러움-부끄러운 행동들-에 어떻게 대응 했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히브리서 12:2 장은 우리에게 그의 대응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경멸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경멸)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부끄러움이 그의 마음을 위협하고 하나님과 복음에 대한 명확하고 순종적인 증언을 포기하고 싶어질때, 이렇게 말했다는 뜻입니다. “부끄러움아! 나는 너를 경멸한다. 나는 너에게 굴복하지 않을것이다. 나는 너에게 어떠한 만족감도 주지 않을 것이다. 당장은 네 하고 싶은데로 나에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네에게 순종하거나 따라가거나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를 경멸한다, 부끄러움아, 네가 나를 지내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12:2는 그가 “그의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부끄러움은 예수님이 가지고 있었던 세상적인 모든 받침목을 없이 했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부끄러운 단념으로 저버리고; 그의 명성은 부끄러운 비방으로 망가지고; 그의 품위는 부끄러운 벌거벗음으로 떨어지고; 그의 안락은 부끄러운 고문으로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그의 현존했던 받침목들이 다 부끄러운 박해로 없어졌다면, 어떻게 그는 그런 부끄러움에 항복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서 12:2는 그가 현존했던 받침목에 그의 마음을 둔 것이 아니고, 곧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그 미래의 기쁨에 소망을 두었다고 말합니다.
비록 부끄러움을 당하여도 예수님은 그의 하나님 아버지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에서 구하시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영광을 주실 힘을 그의 오른손에 쥐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도 이와 같았습니다. 로마서 1:16에 그가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 나를 미련한 것을 설교한다고 조롱하는 교양있는 모든 헬라인들나 거짓 그리스도를 설교한다고 비웃는 믿지않는 모든 유대교인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왜?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 ,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으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1:4), 그리고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에 대한 말씀, 이 말씀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당하되 부끄러워 하지 않음은
그렇다면 당신이 복음을 믿고 나누는 가운데 당하는 부끄러움 감정을 어떻게 극복할까요? 정답: 용서받은 죄인들에게 궁극적인, 영원한 기쁨을 초래하는 복음의 권세를 깊이 생각하십시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외에는 이세상의 어떤 것도 이것을 이룰 수 없습니다. 유대교(예수님까지 이르지 않는),불교, 힌두교, 이슬람교-이들은 죄로 인한 거룩하신 하나님과 분리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있는, 그리고 죄인들에서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한 은혜의 소망을 주는 구원자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한 메세지 만이 죄인을 구원하고 그들을 안전하게 하나님 앞으로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것 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예수님 자신도- 말합니다. 고통을 당하는 것, 네. 오해를 당하는 것, 네.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 네. 그러나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마십시요.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나,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메세지가 세상에서 유일한 마지막 승리의 메세지 이기 때문입니다. 단기간의 고통. 장기간의 이득. (구원의) 기쁨이 당신 앞에 놓여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십시요. 부끄러움을 당하고 그 부끄러움을 개의치 마십시요.
마지막으로, 이 말씀이 남은 90년대에(이 설교 당시)에 어떤 의미인지 보겠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나누는 것으로 인해 당신을 어떻게 부끄럽게 합니까? 60년대 했던 것과 똑같지 않지요. 얼마전 알리스터 베그(Alistair Begg)가 그의 믿지 않는 친구들이 60년대에는 그들이 복음이 진실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비판했다고 말했다고 들었습니다. 90년대에는 진실이라는 것 자체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 비판 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요즘에는 네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움을 주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너는 오만하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움을 주는 것이라는 겁니다. 당신이 나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나쁜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세계관이 결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불화를 일으킨다는 겁니다. 오늘날, 종교적인 주장들 속에서 가장 위대한 부끄러움을 주는 무기는 당신이 참을성이 없고 따라서 옹졸하고 독선적이라는 비방입니다.
그것에 대해 우리는 확고히 대응해야만 합니다: 구원의 방법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14:6)”고 하셨다면 사랑한다면, 우리는 만드시 이세상에 진 우리의 빚을 갚아야만 할 것이고, “참을성 있는” 90년대의 부끄러움을 경시하고 그들에게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슴이라 하였더라”(사도행전 4:12) 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권능입니다.
*개역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