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sion for the Supremacy of God, Part 2/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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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97

하나님의 최고위에 대한 열정 1편 리뷰

하나님은 하나님 중심적입니다.

어제, 빙하에 횃불을 들어 올리기 위한 시도로 그리고 모든 사람의 기쁨을 위한 모든 일에서의 하나님의 최고위를 위한 열정을 전파하기 위한 시도로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하신다는 점을 입증하기에 주력했습니다. 전 우주에서 하나님을 향한 가장 열정적인 마음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주제 였습니다. 패션 ‘97의 주제는, 제가 알기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열정입니다. 창조로 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가 하시는 모든 일은 그의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고 높이기 위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중심적임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 얘기한 두번째 요점은 이것이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자신을 높이는 것이 사랑이 아니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찬양하는 것이 인간의 영혼을 만족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편 16:11).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 높임-우리로 하여금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도록 높임—이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킨다면, 하나님은 이 우주상에서 자기 높임이 가장 큰 미덕이고 사랑의 본질일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이러한 점을 모방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높여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을 즐거워하게 한다는 것은 악의에 찬 것입니다. 사랑이 아니죠. 왜냐하면 당신이 그들을 그들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있는 분에게 집중할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다움을 모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 우주에서 자기 높임이 사랑의 본질이요 기초가 되는 절대적으로 유일무이한 분입니다. 하나님이라면 이것은 필연적이죠.

우리는 사람이 상대방을 중심에 두어 사랑을 하듯 하나님도 그렇게 하시길 바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여전히 하나님일 수는 없습니다. 그분 자신이 무한히 귀중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죠. 그러므로, 막 말하자면, 그는, 여러분이 있건 없건 간에,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모든것이 충족되고 자족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기반입니다. 여러분이 은혜의 초점을 스스로에게 둔다면, 그것은 더이상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은혜가 성경적인 은혜입니다.

내 기쁨은 하나님이 나를 우주의 중심으로 만드는데 있는것이 아닙니다. 내 기쁨은 하나님이 영원히 우주의 중심 되심에 있고 그와 교제하도록 나를 가까이 하사 영원토록 그를 보고, 알고, 즐기고, 소중히 여기고, 그 안에서 만족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어제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중심적임이 인류에 미치는 함축적 의미

자 오늘… 이제까지 내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성경적이라면, 여러분의 삶을 위한 아주 놀라운 함축적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곳을 떠나서 교회나 학교로 돌아가서 해야 하는 일은 최선을 다해서--하나님 안에-- 당신을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천직으로 만드는 겁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요청하는 것은 하나님이 능력으로 당신안에 불어넣어 주시는 모든 힘을 가지고 당신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을 당신의 영원한 천직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나의 문제 그리고 여러분의 문제는 당신이 본분을 다하지 않고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이, 또는 성경이 판단하는 당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C.S. Lewis가 그의 많은 삶을 변화시켰던 설교, “The Weight of Glory(영광의 무게)”에서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쉽게 만족되는데 있다고 말하면서 정확히 정곡을 찔렀습니다. 그는 우리가 바다에서 보내는 휴가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빈민촌에서 진흙파이를 가지고 노는 아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황금 현실이 우리 앞에 놓여있는데 깡통 허상을 끌어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만족됩니다. 이세상의 문제는 희락주의가 아니고 진정으로 만족을 시키는 것을 향한 희락주의의 결핍입니다. 이것이 오늘 아침 말씀의 요점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함축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서, 조지 뮐러(George Mueller)처럼, 나가서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반드시 하나님 안에서 내 마음을 기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난 모두에게 무익할 것이다. 난 그들을 이용하고 그들로 나의 갈망과 공허를 만족시키도록 노력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다른 사람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려 놓기 원한다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지는 걸 당신의 목표로 삼아야만 합니다. 그것의 오늘 말씀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만족됩니다.

우리는 지극히 작고, 일시적인, 부적당한, 만족되지 않는 기쁨에 머물러서, 우리의 기쁨에 대한 용량을 쪼그라 트려서, 이제는 기쁨 없는 일들을 미덕의 본질로 만들어, 하나님이 바꿀수 없는 변화되지 않은 우리의 마음을 숨기려로 합니다. 얼마나 도피주이적인지 보이십니까? 오늘 아침 나는 어떠한 윤리적 행위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그 미덕을 소멸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금욕주의자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와 같은 깨달음의 철학자들에 대항하여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곳에서 경배, 미덕, 용기, 그리고 하나님 중심적임을 파괴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영혼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관점에 두지 않고 그의 의무를 수행하는 고결한 사람을 높입니다. 몹쓸것! 영원히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라져라!

나는 복음주의적 성향에 떠도는 그 무엇에 반대하여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캠페인을 25년전쯤 시작하였고 그 이후로 계속 내 가족을 그 안에서 키우고, 교회를 그 위에 세우고, 그것에 관한 책들을 집필하며, 그것을 살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차츰 난점들이 제기 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성숙되는 과정입니다. 여러분 중에 몇몇이 이 집회가 여러분의 세상을 뒤집어 놓고 있는거 같다고 저에게 말을 했습니다. 이론적 틀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획기적인 변화가 곧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바로 여러분의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난점으로 어쩌면 15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1968년에 나는 댄 풀러(Dan Fuller), C. S. 루이스(C.S. Lewis),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다윗왕, 그리고 사도바울과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것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내 사고 방식은 이렇게 작용합니다. 난점이 하나씩 떠오를 때마다 움씰하고는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 울고 불고 몸부림치고 구하고 기도하고 말하고, 그러면서 조금씩 난점이 시야를 다듬어 갑니다.

난점들

  1. 정말 성경이 우리 마음과 지성과 혼과 힘을 다하여 우리의  기쁨을 추구하라고 가르치는가, 아니면 이게 단지 존 파이퍼의 관심을 끌기위한 영리한 설교술인가?
  2. 그렇다면 자기부인은?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3. 이것은 감정에 너무 많은 치중하는 것이 아닌가? 기독교는 우리의 헌신과 결정을 통한, 궁긍적으로는 의지의 문제가 아닌가?
  4. 어렵고 내키지 않을때 의무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고귀한 개념은 어떻게 인식하게 되나?
  5.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아닌 나를 만물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닌가?


난점들에 대한 답

1. 정말 성경이 우리의 기쁨을 추구하라고 가르치는가?
나의 답은 “그렇다” 입니다. 적어도 4가지 방법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a) 계명으로
시편 37:4 –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Delight yourself in the Lord:여호와 안에서 너 자신을 기뻐하라-영어 표준 성경).” 이것은 제안이 아닙니다. 이것은 계명입니다. 만약 당신이 “간음하지 말라”가 순종해야 하는 것이라면, “여호와 안에서 너 자신을 기뻐하라” 또한 순종해야 합니다.

또 시편 32:11, “여호와를 기뻐하며(Be glad in the Lord: 여호와 안에서 기뻐하며-영어 표준 성경)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시편 100,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이것은 계명입니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라”. 또 빌립보서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런 말씀은 성경 전역에 걸쳐 있습니다. 계명 말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첫번째 방법입니다.

b) 위협으로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는 한때 “ 하나님은 만약 당신이 기쁘지 않을꺼라면 끔직한 것들로 위협합니다” 하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을 당시 표현이 창의적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창의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28:47절의 인용입니다. 충격적입니다. “네가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라.” 하나님은 당신이 그 안에서 기쁘지 않을꺼라면 끔직한 것들로 위협합니다. 이것이 희락주의의 근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온 힘을 다해 하나님 안에서의 당신의 기쁨 추구를 당신의 삶의 천직으로 여기기 위한 근거가 되지 않습니까?

c) 구원의 믿음을 궁극적으로 예수안에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것으로 만족되는 것이라고 드러냄으로

예를들어,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온것에 대해서 그가 상 주실 것임을 명확히 확신하고 오는것. 이것을 믿지 않는 다면, 혹은 이외에 다른 이유로 하나님께 온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또 요한복음 6:35을 보면, 예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점에 주목하십시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믿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믿음입니까? 믿음이란, 요한의 신학에서, 다른 그 어떤것도 만족시킬 수 없는 우리의 영혼의 만족을 위하여 예수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것 이외의 어떤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좀 생소한 언어로 기본 기독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d) 죄를 하나님안에서 당신의 기쁨 추구를 저버리는 어리석음으로 정의함으로

죄는 하나님 안에서 당신의 기쁨 추구를 저버리는 어리석음입니다. 이 구절을 보십시요: 예레미야 2:12-13: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질겁할)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말해 보십시요. 무엇이 악입니까? 악의 정의는 우주를 놀라게(질겁하게)하는, 하나님의 천사들로 하여금 “안돼, 그렇순 없어!”를 외치게 하는…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보고 “고맙지만 됬어요” 라고 말하고는 텔레비젼, 성교, 파티, 술, 돈, 명성, 시외의 좋은 집, 휴가, 새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고개를 돌려 “그래!” 라고 말하는 것. 미친짓입니다! 예레미야 2:12에 따르면 이것은 모든 하늘로 하여금 놀라게(질겁하게) 합니다.

이렇게 네가지 방법으로 적어도 성경은 존 파이퍼가 오늘 아침 하나님 안에서의 너의 만족을 추구하기에 전력을 다하라는 것이 진리라고 말합니다. 첫번째 난점이 없어집니다.

2. 그렇다면 자기부인은?

예수께서 마가복음 8:34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당신이 죽는 곳, 사형의 장소 입니다. 이것은 까다로운 시어머니나 못된 한방 친구, 또는 당신 뼛속에 병 같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자신의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파이퍼, 당신이 우리에게 우리 영혼의 만족을 삶의 천직으로 추구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이단적이지 않는가’. 나도 그렇게 느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절을 읽었습니다 (문맥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해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여기에 있는 논리가 무엇입니까? 이 구절들에서 예수님의 논리가 무엇입니까?

논리는 이렇습니다:

--“오, 내 제자들이여, 너의 목숨을 잃지 말아라. 너의 목숨을 잃지 말아라. 목숨을 구해라. 너의 목숨을 구해라!”
-- “어떻게요?.. 어떻게요, 예수님?”
-- “잃어라”
-- “이해가 안되요, 이해할 수 없어요, 예수님”
-- “내 말은, 제자들아, 나의 사랑하는 이들아, 나를 제외한 너의 모든것을 잃는다는 의미에서 네 목숨을 잃으라는 것이다. ‘호밀씨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 하나로 남지만 그것이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명예를 버리고, 부를 버리고, 죄스러운 성교를 버리고, 앞서기 위한 속임을 버리고, 너를 인정해 줄 사람들의 필요를 버리고, 버려라 그리고 나를 가져라”

나는 자기부인을 믿습니다. 황금을 가지기 위해 자신의 깡통을 버리십시요. 바위 위에 서기 위해 자신의 모래를 버리십시요. 와인을 가지기 위해 자신의 불쾌한 물을 버리십시요. 완벽한 자기부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자기 부인을 믿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하신 예수님에 대한 이 말을 믿습니다: 마태복음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 이것을 자기 부인이라고 부릅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팔았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폐물, 쓸모 없는 것으로 여기고 예수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네! 이것은 자기부인입니다: 그리고 아니오! 이것은 자기부인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박혀야 할 자신이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신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자신—예수님을 모든 것보다도 더사랑하고 그안에서 만족을 찾는 자신—그 자신을 죽이지 마십시요. 그것은 새 창조 입니다. 하나님안에 그 자신을 흡족시키십시요.

오, 나는 자기부인을 믿습니다. 나는 그 부유한 청년이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이 그 당시 가르치셨던 자기부인을 믿습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은 완전히 대경실색해서 말하기를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하니 예수님이 이르시길, “사람으로는 할 수 없도다. 아무도 내가 요구하는 것을 그들만의 힘으로 할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그는 말하기를 “모든일을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베드로가 말하기를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의 대답은—그때 그 목소리의 톤을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베드로야,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어미나 아비나 형제나 자매나 전토나 자식을 버린 자는 이 세상에서100배로 어미나 자매나 형제나 전토나 자식을—고난과 함께—받고 또 미래에 영생을 상속하리라. 네가 희생하는 어떤것도 1000배로 갚아지지 않을 것이 아무것도 없느니라. 네가 나를 위하여 순교를 당하여도 스스로를 불쌍이 여기지 말아라” (마가복음 10:17-31)

그렇습니다. 나는 자기부인을 믿습니다. 나는 내가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만족되는데 거리끼는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성경이 말하는 자기부인입니다. 나는 데이빗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 과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이 위대한 선교사들이 다음과 같이 말할때 철저히 옮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내를 잃고 건강과 한가지를 제외한 모든것을 다 잃고 삶의 끝에 다가서면서 켐브리지 대학 학생들과 다른 이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희생한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그들이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압니다. 여러분도 아실겁니다. 짐 엘리엇(Jim Eliot)이 청년시절, 그의 목숨을 내려 놓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철저히 맞는 말입니다. “자기가 붙들어 둘 수 없는 것을 주고 자기가 잃을 수 없는 것을 얻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현명한 사람이다). 그것이 내가 믿는 자기부인입니다. 두번째 난점이 없어집니다.

3. 감정에 너무 많은 치중하는 것이 아닌가?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결정이 아닌가? 의지의 헌신? 감정은 그저 부수적인, 선택의 여지가 있는 케익 위에 당의(아이싱, icing)같은 것이 아닌가? 파이퍼, 당신이 말하는 기독교는 감정을 성서적이지 않은 너무 중요한 위치로 높이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성경을 읽으면서—논쟁이 있을때, 성경을 읽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다음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기쁨을 느끼도록 명령 받았습니다: 빌립보서 4:4, “주 안에서 기뻐하라.” 우리는 소망을 느끼도록 명령 받았습니다: 시편 42:5,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도록 명령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12:5, “영혼과 몸을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가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우리는 평화를 느끼도록 명령받았습니다: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골고새서 3:15). 열심을 느끼도록 명령받았습니다:로마서 12:11, “성령안에 부지런하고(축어적으로 ‘부글 부글 끓음’) 열성을 시들리지 말라.”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절대로 열성을 시들리지 말라.” 우리는 슬픔을 느끼도록 명령 받았습니다: 로마서12:15,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당신은 울어야만 합니다. 우는자들과 함께 울먹임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사모하도록 명령 받았습니다: 베드로 전서 2:2, “진정으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당신은 “난 임으로 더 사모하게 할 수 없어. 그러니 내가 어떻게 이것에 순종할 수가 있나? 이것은 명령일 수 없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틀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러한 감정들을 임의로 켰다 껐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여전히 (지켜야 할) 의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제 저녁에 얘기했던 그 절망적인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모든 것들은 당신이 당장 따르도록 명령 되었지만 여러분은 지금 이순간 의지나, 결정, 헌신함으로 따를 수 없습니다. 기적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절망적이지 않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부터 여러분이 할 수 없는 것들을 해야만 한다고 듣는 것이 절망적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바를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타락했으며 다정하도록 명령 받았습니다: “서로에게 친절하고 다정하라.” 용서는 단순히 “미안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정말 그렇게 느껴야만 합니다. 우리는 감사함을 느끼도록 명령 받았습니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할머니로 부터 선물을 받은 어린이를 보십시요. 선물은 검정 양말이었습니다. 윽! 어떤 어린이도 크리스 마스에 양말을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검정 양말이라니. 당신은 말하죠, “할머니게 감사하다고 해야지.” 그럼 그 아이는. “양말 고맙습니다” 하죠. 성경이 말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의지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의지력으로 그 양말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의지력으로 에베소서 5:20, “범사에 감사하라” 명하신 것처럼 하나님께 고마움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행하시지 않는 이상은.

세번째 난점? 난 동의하지 않습니다. 내가 성경에서 말하는 것 이상으로 애정, 감정, 정서를 높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결정 중심적이고 헌신을 중시하는 의지적인 미국인의 ‘우린- 할 -수- 있어’ 종교가 그들을 떨어뜨린 곳으로 부터 이제는 제어할 수 없게 되었지 때문에 그들을 복위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4.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고귀한 개념은 어떻게 인식하게 되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본분(의무)이 아닌가? 파이퍼, 당신이 말하는 기독교는 섬김의 종교 같지 않다. 어려울때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어려움에 이기는 충성된 섬김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는 법을 깨달았습니다. “섬김의 은유를 구체화하는 몇몇의 성경 구절을 살펴 봅시다.” 모든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관계를 나타내는 은유에는, 그것이 종으로든, 아들, 딸, 혹은 친구로든 간에, 강조하면 거짓이 될 수 있는 그런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 그 속에는 강조하면 진리가 되는 그런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섬김의 유추에서 어떤 것이 거짓이고 어떤 것이 진리 일까요?

이 두가지(진리와 거짓)를 구별해서 당신이 섬길때 신성모독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은 사도행전 17:25과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하나님은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조심 하십시요. 그분은 당신이나 당신의 섬김을 필요해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0:45을 보십시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는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닙니다. 주의 하십시요! 주의 하십시요! 당신이 그를 섬기기에 착수한다면, 당신은 그의 목적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혼란스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바울은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거의 모든 서신에서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25 와 마가복음 10:45에 말하기를 하나님은 섬김을 받지 않으시고 인자는 섬김을 받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분명 악한 섬김과 선한 섬김이 있습니다. 무엇이 선한 섬김일까요?

선한 섬김은 베드로 전서 4:11입니다: “만일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찬양하고 글을 쓰고, 강의를 듣고, 운전을 하고, 기저귀를 바꾸고, 설교를 하는데 있어서 항상 받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주는 자는 영광을 받고 받는 자는 기쁨을 얻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사도행전 17:25—“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받는 사람인 양)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지 않으신다”--를 거스르면 우리는 신성모독을 하는 것입니다.

어제 이 모임의 지도부들에게 섬김에 관한 마태복음 6: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을 인용해 이런 얘기를 했죠. 섬김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재물의 필요를 충족시켜 줌으로 재물을 섬기지 않습니다. 당신의 모든 힘과 시간과 노력을 다해, 재물로 부터 이익을 얻으려고 가차없이 사는 삶의 태도를 취함으로 재물을 섬김니다. 당신의 머리는 어떻게 영리한 투자를 하고, 어떻게 최익의 거래를 하고, 어떻게 낮은 곳을 찾아 올라갈 곳에 투자하는 것을 생각하는라 돌아갑니다. 당신은 어떻게 재물로 부터 이익을 얻을까로 소모되고 있습니다. 재물이 당신의 공급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당신이 재물을 섬기는 방법에 대한 진실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십니까? 정확히 같은 것입니다: 당신의 삶의 태도를 취하고 자신의 삶을 조절해서 모든 힘과 노력과 시간과 창의력을 다해 자신을 하나님의 끝없는 축복의 폭포아래 가져 가는 것. 그래서 그는 공급자로 그리고 당신은 영원히 받는 자로 남는 것. 당신은 수혜인으로 ,그는 후원자로, 당신은 배고픔으로, 그는 양식으로, 당신은 갈증으로 그는 물로서 남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과 역할을 바꾸는 그런 신성모독은 하지 마십시요. 여러분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섬기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섬길때 나는 받는 자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수혜자가 되고 내가 후원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이죠. 세상에도 수 많은 이런 종교가 있습니다. 그래서 네번째 난점이 풀립니다.

5. 이렇게 당신 자신을 만물의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닌가?

“당신은 자신의 기쁨과 즐거움 추구에 대해 말하고 있고 우리가 알아 왔던 것과는 다른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또 우리는 섬김에 대해서 조심해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에게는 당신은 성경의 말씀을 조절하고 조작해서 자신을 중심으로 만드는 것 같이 들린다.” 이것이야 말로 모든 비판중에 가장 통렬한 것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 대답은 이렇습니다:12월 21일이면 결혼한 지 28년이 됩니다. 나는 노엘(아내, Noel)를 많이 사랑합니다. 많은 일들을 같이 겪어 왔습니다. 정말 힘든 시간들과 정말 좋은 시간들. 우리는 십대였던 우리 아이들이 엄청나게 힘든 십대를 보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 아들들과 어린 딸을 생각할때 가장 쉽게 눈물을 흘립니다. 내가 12월 21일에 탐스런 28송이 빨간 장미를 등 뒤에 숨기고 집에 와서 우리집 초인종을 누른다고 가정합시다. 노엘이 문을 열고는 내가 왜 (열쇠로 열고 들어오지 않고) 집의 초인종을 눌렀는지 의아해 합니다. 내가 숨겼던 장미를 보여주고 “행복한 결혼 기념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곤 그녀가 “조니(Johnny-존의 애칭), 정말 아름답네요. 왜 이런걸” 했을때 내가 대답합니다. “내 의무요.”

틀린 답이죠. 다시 돌아갑시다.

[딩-동]—“행복한 결혼 기념일, 노엘”—“조니, 정말 아름답네요. 왜 이런걸”—“당신에게 장미를 사주는 것보다 더 날 기쁘게 하는 것은 없어요. 사실, 오늘 저녁에 아기 볼 사람을 연락해 놨어요. 오늘 저녁은 나가서 뭔가 특별한 일을 합시다. 당신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오늘 저녁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요.”

이것이 맞는 답이죠.

왜? 왜 그녀가 “당신이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이기적인 기독교 희락주의자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라곤 오직 당신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 뿐이니.” 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무슨 뜻입니까? 왜 의무가 틀린 답이고 기쁨이 맞는 답일까요? 이해하십니까?

이걸 이해하신다면 (내 설교를) 이해한 겁니다. 나는 이제 미네아폴리스로 돌아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내 아내는 내가 그녀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내 안에서 가장 영화롭게 됩니다. 만약 내가 우리 관계를 섬김의 관계로, 그녀안에서의 나의 기쁨을 추구하지 않는 의무의 관계로 바꿔 버린다면 그녀는 경시되는 겁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죠. 당신이 천국에 갔을때 하늘 아버지가 바라보시며, “왜 여기에 와 있나? 왜 나를 위해 네 목숨을 내려 놓았나?” 하실때, “내가 기독교 인이기 때문에 (여기) 오는 것이 나의 의무였습니다.” 라고 대답하지 않아야 겠죠. 오히려 “제가 이곳 이외에 다른 어느 곳을 가고 싶겠습니까? 다른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당신이 나의 영혼의 소망입니다.” 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모임의 이유 입니다. 이 모임은 이사야서 26:8 절의 말씀처럼 268세대에 합쳐지는 두가지 위대한 것들에 대한 것입니다:나의 모든 소망을 만족시킴은 그의 이름과 명성을 위한 하나님의 열정임과 동시에 우리 마음의 열정입니다. 이것이 우주에서 흔들릴 수 없는 두가지 사실입니다. 내가 여러분이 알게 됬길 소망하는 것은 이 두가지가 하나라는 것,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의 이름, 그의 명성은 우리가 그 안에서 가장 만족되었을때, 가장 영화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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